
제목 [교실 밖 생존교양] '14 대 1'의 모순…거부권에 갇힌 세계 평화
[EBS 뉴스]
서현아 앵커
학교 밖 세상을 읽는 힘을 키우는 교실 밖 생존 교양 시간입니다.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국제 분쟁에 국민들이 일상마저 흔들리고 있는데요.
이런 가운데 세계 곳곳의 전쟁을 중재해야 할 유엔(UN) 같은 국제기구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과연 존재 이유가 있는지 의문마저 제기되고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선 이 무거운 질문을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경기 풍산고등학교 승지홍 교사와 자세히 짚어봅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중동에서도 긴장이 이어지면서 "유엔 같은 국제기구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수업하시다 보면 뭐 이런 의문들에 직면하시게 됩니까?
승지홍 교사 / 경기 풍산고등학교
교실 분위기도 뉴스를 보며 답답해하시는 시청자분들과 비슷합니다.
수업 시간에 관련 뉴스 클립을 잠깐 보거나, 아이들이 스마트폰으로 접한 참혹한 분쟁 소식을 이야기할 때면, 학생들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절실한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선생님, 유엔은 도대체 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나요?", "당장 가해국에 강력한 제재를 가해서 무력으로라도 멈추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묻곤 하죠.
평화를 지키라고 만든 국제기구가 전쟁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학생들 입장에서는 순수하게 분노하기도 하고 국제기구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답답해 하는 거죠.
서현아 앵커
그렇다면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것처럼, 유엔 같은 국제기구는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 걸까요?
승지홍 교사 / 경기 풍산고등학교
유엔은 단순히 말만 하는 곳은 아닙니다.
실제 분쟁 현장에서 총성을 멈추게 하는 '파란 헬멧', 즉 유엔 '평화유지군'이라는 실질적인 평화 유지 장치를 가동하고 있죠.
이들의 임무는 적을 섬멸하는 게 아니라, 교전 중인 두 세력 사이에 개입해 물리적 충돌을 차단하는 이른바 '지구촌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유독 강대국이 얽힌 전쟁에서는 힘을 못 쓰는지 이해하려면, 국제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들여다봐야 하는데요.
저는 학생들에게 이를 '담임 선생님이 없는 교실'이라고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교실에서 싸움이 나면 말려줄 선생님이 있어야 하는데, 국제사회에는 국가 위에 군림하며 규칙을 강제할 절대 권력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엔은 군사적 강제력과 경제적 제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기구, '안전보장이사회'를 만들었죠.
그런데 이 안보리의 의사결정 방식은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총 15개국 대표로 구성되는데, 그중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라는 5개 상임이사국에게는 '거부권'이라는 막강한 특권이 주어집니다.
이 권한의 위력은 절대적입니다.
설령 나머지 14개 나라가 모두 찬성하더라도, 상임이사국 중 단 한 나라만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 결정은 즉시 무효가 됩니다.
'14 대 1'의 상황에서도 단 한 명이 전체의 의사를 멈춰 세울 수 있는, 다수결 원칙이 전혀 통하지 않는 독특한 규칙인 셈입니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 대표적인 사례죠.
가해 당사자인 러시아가 상임이사국으로서 스스로 거부권을 써버리니, 유엔의 이름으로 평화유지군을 보내거나 강력한 제재를 내리는 길이 꽉 막혀버리는 겁니다.
이처럼 평화를 위한 시스템이 강대국의 자국 우선주의에 가로막히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학생들이 냉혹한 국제 사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스스로 고민해 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서현아 앵커
네, 만약에 가해 국가가 거부권을 써버리면 의사결정이 멈춘다.
참 구조적인 모순이 있는 건데 이런 한계 때문에 "유엔이 과연 필요한가" 여기에 대해서도 찬반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엔은 계속 유지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변화가 필요할까요?
이 두 가지 입장이 다 있을 것 같은데요?
승지홍 교사 / 경기 풍산고등학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먼저, 낡은 조직이라며 변화가 시급하다는 회의적인 시각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불평등한 규칙, '거부권' 때문입니다.
마치 축구 경기에서 반칙을 한 선수가 심판의 호루라기를 빼앗아버리는 모순과 같죠.
게다가 이 거부권을 피해 '유엔 총회'를 열어 다수결로 결의안을 통과시키더라도, 총회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어 이를 강제할 실질적인 수단이 없습니다.
학교폭력 가해 학생에게 징계 없이 말로만 훈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가해국들은 유엔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승전국 5개국에게만 독점적인 권력을 쥐여준 체제가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흥국이 성장하며 국제 지형이 바뀌었는데도, 80년 전 할아버지의 낡은 정장을 인공지능 시대인 지금까지 억지로 입고 있다는 치명적 한계가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목소리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유엔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무엇이 정의인지 판결하는 '지구촌의 양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전쟁을 멈추지는 못해도 전 세계가 모여 침략자에게 뚜렷한 낙인을 찍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참혹한 분쟁 현장에서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건 결국 유엔입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 구호 트럭을 보내 빵과 백신을 나누고, 잿더미 속에 천막 교실을 세우는 일은 오직 유엔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실천이죠.
유엔이 모든 전쟁을 막을 순 없겠지만, 절망에 빠진 시민들에겐 최후의 방어막이 되어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유엔의 존재 이유를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서현아 앵커
네, 교과서에서 배우는 국제기구의 역할은 참 이상적인데 또 실제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
이 간극 속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승지홍 교사 / 경기 풍산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국제기구를 '지구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들의 협력체'라고 정의합니다.
기후 위기나 빈곤처럼 어느 한 나라가 혼자서는 도저히 풀기 힘든 거대한 숙제들을 함께 해결해 나가기 위해 만든 '국가 간의 단단한 네트워크'라고 나와 있죠.
하지만 실제 국제정치는 강대국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교과서 속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짚어주면서, "국제기구가 제 역할을 못 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꼭 던져보라고 조언합니다.
사실 유엔 같은 기구가 멈춰 선다고 해서 국제사회의 노력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최근에는 국가 단위의 협력을 넘어선 시민들의 직접적인 연대가 아주 큰 힘을 발휘하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 기후 위기에 맞서는 '그린피스'나 전쟁터의 생명을 구하는 '국경없는의사회' 같은 국제 시민단체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국가의 이익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우선하며 국제기구의 빈자리를 실질적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학생들이 교과서 밖의 생생한 현실을 보며, 단순히 국제기구의 한계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작은 기부나 SNS를 통한 목소리 내기처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갖게 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 새로운 협력의 물결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되도록 돕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현아 앵커
네, 그렇다면 이렇게 국제기구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서 우리 학생들의 일상에 영향이 생기는 사례가 또 있을까요?
승지홍 교사 / 경기 풍산고등학교
국제기구의 결정은 우리 학생들의 오늘과 내일의 삶을 바꾸는 강력한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기후 변화 대응이죠.
유엔 기후변화협약에서 탄소 감축을 결정하면, 우리나라의 정책이 바뀌고 기업들은 친환경 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결국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회용품을 줄이거나, 미래에 탄소 중립과 관련된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는 것도 모두 국제기구에서 시작된 커다란 물결입니다.
교육과 인권, 노동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네스코나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하는 글로벌 표준은 우리 법과 제도의 든든한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학생 인권이나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규범들도, 사실 국제기구가 오랫동안 권고해 온 인류 공동의 가치가 우리 삶에 뿌리 내린 결과물입니다.
결국 국제기구는 '미래의 규칙을 그리는 설계도'를 만드는 곳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국제기구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죠.
그 설계도가 어떻게 그려지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과 일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서현아 앵커
네, 중요한 건 국제기구의 한계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연대'가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